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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sujiro (http://blog.paran.com/yasujiro)  수정하기 삭제하기
철인28호-각론에 앞선 메모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처음부터 밝은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아동만화'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명확한 선을 긋고 나뉘어지지 않았을 시절이었기 때문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밝고 명랑한' 이야기를 그려야할 부담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던 기술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전전(戰前)세대인 그의 눈에는 정당한 노동의 댓가 같은 순수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동시대의 데즈카와 비교해도 작가로서보다는 장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특정한 목적의식을 추구하는 만화그리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였지만 유년기를 전쟁의 체험으로 보낸 동시대인의 어떤 보편적인 정서를 읽어내는 예민한 감각은 있었던 것이다.

번영의 바탕이 된 과학기술이 순수한 기술자들의 몫이 아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탄생한 거대로봇은 결코 가치중립적인 정의의 심판관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요코야마의 손에 의해 창조된 이 거대한 기계인형은 어두운 기억을 그림자처럼 드리운 전전의 망령이었으며, 그를 둘러싼 또다른 망령들에 의해 언제든지 그 악마적인 본성을 드러낼수 있는 무서운 도구였던 것이다. [철인]이 인기를 끌면서 어린이들의 문화를 대변하는 아이콘처럼 떠오름에 따라 애초에 그렸던 살상도구로서의 몰가치한 성격은 희석되고 '정의의 사자'라는 캐릭터로 굳어져가는 와중에도, 그 기괴하고 음울한 아우라는 철인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외양이나 성격 속에 남아 끝까지 작품 전반을 맴돌았다.

때문에 요코야마는 살아생전 자신의 원작을 애니메이션화한 시리즈들에 대해 언제나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애니메이션 속의 철인은 어느 시대에 나온 것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로봇의 가장 중요한 존재조건에 대한 설명을 빼먹은채 진행되고 있었다. 63년에 처음 등장한 TV시리즈가 철인에게 어린이들의 친구라는 인격을 덧씌우는것에 그는 엄청난 모순을 느꼈으며 나중엔 제작진에게 "방영 이후엔 필름을 소각해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였다. 63년 작 철인이 적지않은 장점을 갖고 있었고 아동물의 전형이 확립되어있지 않던 시절의 TV 애니메이션이 보여줄수 있는 자유분방함이 있었음에도 작가가 이를 냉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회를 거듭할수록 정의의 사자라는 이미지로 굳어져가는 철인과 쇼타로의 캐릭터에서 과거를 숨긴 망령(그것도 자신이 창조한)의 가면 뒤에 숨은 일그러진 실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80년판(이른바 [태양의 사자]) 철인은 전전과 전후의 연결고리로서의 철인이 가진 '통시성'을 제거하고 철인의 설정요소와 이야기구성의 문법이 가진 '공시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역사적 상흔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근미래의 시공간에서 다시 창조된 철인과 등장인물에게서 이미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 뒤에 깔린 어두운 그림자같은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요코야마의 텍스트가 갖고있던 공시적인 특성, 특정한 시공간에 대한 부차적인 설정을 최소화하고 긴 호흡의 내러티브보다는 단편적인 에피소드 위주로 끌어가는 서사구조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태양의 사자]판은 서사의 구조와 구성요소의 자율성이라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요코야마판 철인의 '공시성'이 가진 장점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원래 철인이 가진 역사적 아우라는 제거되었지만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거대화된 도구라는 특성을 그대로 살림으로서 결과적으로 위험한 도구로서의 철인이 가진 이중적인 캐릭터를 어떤 시리즈보다도 잘 살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리즈의 기본 컨셉으로 내세운 '어린이들의 친구 철인 28호'라는 이미지와 작품 안에서 정면으로 충돌함으로서 어린이 대상의 TV로봇물로서는 몹시 이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요코야마가 이 시리즈에 대해 갖고있는 양가적인 감정("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역시 생각과는 다르"다는)은 자신에 의해 창조된 로봇물의 세계가 이후 어린이들의 상상 세계를 도식화하면서 형성된 7~80년대 수퍼로봇물의 틀과, 요코야마 세계관의 공시적인 특성이 뒤섞이면서 일어나는 불협화음과도 같은 것이다. 수퍼로봇과 리얼로봇의 세계가 그 역사성을 잃어버린채 짜여진 틀에 따라 확연하게 갈라져버린 시대에 철인의 서사구조나 양식은 이미 어느 쪽에서 보기에도 이질적인 방식이었던 것이다.

... 때문에 이마가와의 철인 리메이크 계획은 철인을 이루는 또다른 축인 통시성의 측면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는 면에서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것은 요코야마가 살아생전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철인에 대해 갖고있던 불만이기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얼마 전에 끝난 TV시리즈 26부작은 시종일관 철인에 얽힌 전쟁시기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암투의 그늘 속에서 진행된다. 쇼타로를 비롯한 등장인물들 모두가 전전의 죄의식과 원한으로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하며 철인을 움직이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들 모두가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주장하지 못한다. 철인은 전후의 고도성장과 마찬가지로 전전의 어둠 속에서 탄생한 괴물이며 그것에 얽힌 모든 이들의 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결국 철인 스스로가 책임을 떠안고 사라져가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론은 그다지 깔끔하지는 않다. 빅파이어 박사를 전전의 이념을 대표하는 '악의 근원'으로 몰아세우고 시키시마 박사나 카네다 박사의 책임을 얼버무리면서 이들의 입장 역시 역사의 광풍 속에 희생된 피해자에 불과함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그러나 이마가와는 여기서 '속죄양'을 내세움으로서 용의주도하게 빠져나갈 구석을 만든다. 괴물을 만들어낸 이들의 죄의식이 해결된다 해도 그것을 만들어낸 자의 책임을 피해갈수는 없으며, 스스로가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적어도 그 괴물을 전후의 수호자로 내세우는 기만을 저지를수는 없는 것이다. 이로서 철인은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전후 일본의 원죄의식을 홀로 떠맡은채 용광로 속으로 사라져간다. 요코야마가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과 기술의 발전 뒤편에서 보았던 전전의 그림자를 이마가와는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그 그림자를 그대로 남겨놓은채 애써 외면하며 앞만 보고 달려나간 것이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이며, 감독은 아무도 책임질 이 없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철인의 품에 떠맡기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서 마무리짓는다.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해결방식이며 개운한 것도 아니지만 전후 일본을 유지해온 현실의 논리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의 번영 속에서 살아온 세대들이 전후를 뒷받침해 온 전전의 추악한 실체와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은 번영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전후의 물적인 혜택과 기술의 발전을 보면서 자라온 전후세대인 이마가와로서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철인을 통해 전전과 전후의 연결고리를 집요하게 추적하면서도 마지막에 철인을 희생양으로 내세워 개운치 못한 결말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후의 혜택을 업고 자란 대다수 일본 전후세대의 불가피한 입장을 대변한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과 과학기술에 대한 추종이 곧 일본 로봇물(또는 SF 일반을 포함하여)의 물적,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의 문을 최초로 연 철인의 존재기반에 대한 의문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다. 이마가와 철인의 시도는 상상을 통한 전후 일본사의 재조명이라는 측면과 함께,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거대로봇물의 세계에 내재하는 부정적인 그림자를 상기시키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과 마찬가지로 역사성을 잃어버린 가상의 매트릭스 안에서 끝없는 게임만을 반복하는 로봇 SF물의 세계가 가진 견고한 틀을 외부에서 뒤흔드는 시도이다. 철인 28호는 거대로봇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일본 애니메이션의 무의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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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28호 시리즈에 대해서는 상당히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일단 이정도의 전제를 두고 시작한다는 의미에서.(제작중인 이마가와의
극장판까지 보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할 생각입니다만)
Comment : 2,  Read : 7041,  IP : 220.85.166.71
2005/01/19 Wed 19:21:00 → 2005/01/20 Thu 01:04:59
capcold 

!@#... "역사성을 잃어버린 가상의..."라는 표현, 일본모델을 베끼려고 안달인 한국의 속칭 '주류대중만화'에도 100% 해당되는 말이죠. 장르 패러디와 자기복제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역시 자기 역사성 확보를 위해서 도구로서 동원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서...

2005/01/20
yasujiro 

장르의 기원으로 돌아가 그 물적 토대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는 이마가와의 [철인 28호], 고도성장의 끝에서 재무장과 패권주의의 망령이 부활하는 현실을 매트릭스 바깥에서 씁쓸하게 바라보는 [WXIII 패트레이버-폐기물 13호]의 두 작품이 최근 5년간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가운데는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국 만화에서는 어떤 사례가 있을지?

200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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