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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00] 보론 | 여성만화의 세계, 세계의 여성만화
여성만화프로젝트 - NO.00 04/06/07 12:02 capcold
자, 이제 여성만화의 세계로 뛰어들어가보자. 잠깐! 본격적으로 개별 작품과 시대별 구분 등 세부항목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재미없는 글 하나만 더 읽고 시작하자. 원래 기쁨은 고통 뒤에 느껴야 더 기쁜 법이다(아니면 말고). 여성만화, 혹은 이 용어가 여전히 너무 모호하고 낮설다면 적어도 여성 ‘지향’ 만화는 그렇다면 현재 어떤 위치까지 왔는가. 여성지향 만화의 흐름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각 시대의 각 사회의 여성의 위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속에서 개별적인 작가들의 성취와 전체적인 흐름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수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면에서 전세계의 현대사와 만화 매체의 상호작용을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전부 소화해낼 생각도, 능력도 없다. 게다가 일반 독자들은 보지도 못한 작품들과 작가들을 나열하면서 자신의 독점적 지식우위를 즐기고 싶어하는 변태도 아니고... 다만 커다란 만화문화권 위주로, 여성 지향 만화들이 걸어온 흐름을 포괄적인 맥락으로 약간씩 건드려볼 생각이다.

[아그리핀], 클레어 브레테셰의 대표 캐릭터

한국의 경우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한국에서 여성지향만화 가운데 커다란 덩어리가 하나의 주류 만화장르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 것이 바로 ‘순정만화’다. 한국에서 순정만화의 흐름이라는 것은 50년대의 순종적 여성상을 넘어, 6-70년대에는 현대화되어가면서도 가부장 가족의 틀을 못벗어나는, 따라서 그것을 선진 문화(이 경우는, 서구) 지향적인 로맨스 환타지로 풀어내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80년대의 문화적 풍요(?)와 사회내 여성지위 향상에 대한 욕구가 맞물리면서 작가주의 지향의 대작과 순정만화 커뮤니티들이 등장했다. 90년대는 이전의 이러한 기반 위에, 시대 특유의 개방성이 겹치면서 완전한 주류장르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명시적으로 여성 정체성과 지향점을 주장하는 만화들이 순정만화 장르 내에서, 또는 외곽에서 (페미니즘 잡지 [이프]의 연재작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탄생했다.

한국에서 초기의 여성지향 만화는 주로 신파 정서의 ‘구박받는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가정을 꾸리는 소녀’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6-70년대에 민애니, 엄희자 등 일련의 작가들의 대본소용 순정만화에서부터 서구지향적 로맨스로 순정만화의 모습, 그리고 그 명칭을 형성해 나아갔다. 하지만 현재의 순정만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특징들은 79년 이후 [캔디 캔디],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 일본 소녀만화의 유산들이 흡수되고 지분과 영향력이 확대된 다음에 나타났다. 80년대 들어서 소위 2세대 순정작가들인 황미나, 이진주, 김동화 등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대본소와 소녀잡지라는 두 가지 경로로 순정만화가 성장해나갔다. 보물섬의 [달려라 하니], [요정핑크], 대본소의 [굳바이 미스터블랙], [불새의 늪] 등 80년대 초반부터 두 경로는 서로 다른 호흡과 스타일로 순정만화의 진화를 견인했다. 그리고 83-4년에 김진 김혜린 신일숙 등 대형 서사극 작가들이 데뷔하면서 순정만화가 소소하고 스케일 작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편견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84년, 순정만화 동호회 PAC(초대회장 강경옥)이 결성되면서, 순정만화 특유의 커뮤니티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85년에는 현업작가들로 구성된 순정만화 동호회 [나인]이 결성되어, 동인지 [아홉번째 신화]를 발간해서 한국만화의 비평적, 창작적 측면에서 기념비적 돌파구로 정말로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미라, 이은혜, 원수연, 등의 작가들이 등단하면서 순정만화의 저력이 준비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88년 순정만화 전문 잡지 [르네상스]가 창간되면서, 김진, 신일숙, 김혜린, 한승원, 이진주, 황미나 등 80년대 동안 내공을 쌓아온 인기작가들의 작품들과 함께, 신인공모전을 통한 신진작가들의 발굴에 나섬으로서 진정한 순정만화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이로써 순정만화의 무게중심이 대본소에서 잡지시스템으로 서서히 옮겨오게 되었다. 문하를 통한 데뷔가 아닌 공모전을 통한 데뷔의 길이 본격화되면서 동호회 역시 한층 활성화되었다. 순정만화의 성공에 고무되어 수많은 잡지들이 명멸하였고, 90년대의 희망찬 빛이 밝아왔다.

90년대에 들어서, 순정만화에서는 잡지는 흥하고 대본소는 망하는 구도로 재편이 이루어졌다. 또한 93년 [윙크] 잡지를 통해서 나예리, 박희정, 유시진 등이 데뷔, 강한 자의식으로 무장되어있으며 자기성찰적인 새로운 순정만화의 감수성을 대표하는 작품성향을 보여주었다. 94년도에 [르네상스]는 비록 폐간되었지만, 순정만화의 인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특히 97년 [리니지] 온라인 게임, [BLUE] 가요음반 발표, 천계영의 [오디션] 대 히트 등 90년대적인 순정만화의 재정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절정은 잡지 [나인]의 창간이었는데, 성인층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포부 그대로, 단순한 로맨스에서 벗어난 보다 성숙한 여성만화의 이야기들이 주류작가, 비주류작가들의 손을 통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덕분에 한혜연, 이진경 등의 작가들이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자의식을 주장하며 “순정만화의 오락장르적 속성을 뛰어넘는 여성만화”를 추구할 수 있었으며, 이애림 최인선 등 여성적 감수성의 파격적인 방식의 표현들이 독자들과 만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2000년대에 들어서, 만화 전반의 침체와 함께 순정만화계에서도 여러 우려가 제기되었다. 2001년 [나인]의 폐간, 2002년 [케이크] 폐간 등 잡지 폐간이 이어지고, 작가와 편집부의 마찰 역시 격화되었다. 하지만 탄탄한 팬-작가 연계에 힘입어, 여러 복간 붐과 새로운 잡지창간 역시 이루어지고 있는 등 아직도 탄탄한 대로를 가고 있는 듯 하다.

일본의 경우

일본의 경우는 한국과 비슷한 구석이 많으면서도, 여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르화된 여성만화인 쇼조망가(소녀만화)는 한국 순정만화의 현재 모습에 대한 일종의 모델이었다. 일본의 쇼조망가는 소녀잡지 위주로 일본에서 발전을 해왔는데, 이미 1910-20년대부터 미형 그림체에 대한 기본 인식이 확립되어 있었다. 최초의 본격 쇼조망가로 꼽히는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를 필두로 64년 사토나카 마치코의 데뷔와 함께 소녀만화잡지 창간 붐을 이루며 서구지향적 모험 로맨스(종종, 서구 로맨스 스토리를 번안하는 경우도 많았다)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가,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꽃의 24년조’ (모토 하기오, 다케미야 게이코 등 쇼우와24년 즉 1949년에 출생한 쇼조망가 작가들을 통칭하는 말) 들의 활약에 힘입어 쇼조망가의 세계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캔디캔디], [에이스를 노려라], [유리가면] 등 대작 여성향 만화들은 단지 인기면에서뿐만 아니라, 연출법, 캐릭터들간의 인간관계 구도, 화풍 등 다양한 측면에서 장르 자체를 재발명해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본 주류만화 특유의 엄격한 출판사 주도의 매니지먼트 시스템, 과잉 장르화된 흐름 속에서 쇼조망가 장르는 전반적인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단지 여성을 주요 대상층으로 하는 잡지에 연재되고 있을 뿐, 그다지 여성 중심의 정체성이나 코드를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여성성의 강조는 오히려 언더그라운드, 비주류 계열에서 일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인디만화 잡지인 [가로]에서 활동하는 키리코 나나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구의 경우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는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우선 이 쪽에서는 한국의 순정만화나 일본의 쇼조망가같은, 주류화된 여성만화 장르 자체가 없다. 개별적인 여성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여성성을 나타내는 작품을 발표할 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만화판은 완전히 남성지향적으로 짜여져 있으며, 여성 작가들은 숫적으로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독자들 역시 만화 전반에 대한 독자들일 뿐, 여성성의 커뮤니티를 만들어낸다든지 하는 움직임은 지극히 미미하다. 어째서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사회적으로 여성해방담론이 일어나는 것과 문화장르로서의 만화의 발전이 동시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두 가지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비해서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여성해방 담론이 현대 장르만화의 발전보다 한참 전에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만화가 여성들에게 지니는 메리트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즉 여성이라는 층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발전한 장르가 나타나지 않고, 그냥 여성들이 그들이 원하는 오락을 다른 장르에서 충분히 찾아내버렸다는 말이다.

우선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은 1930년대에 ‘코믹북’ 이라는 출판 양식이 히트를 치면서 만화의 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 코믹북 중심의 미국 만화계는 초창기부터 개인 작가보다는 프로덕션 위주의 생산이 강했는데, 특히 세계대전의 와중에 남성들이 군인으로 차출되면서 여성 만화작가들이 프로덕션에 들어가서 만화를 그리는 경우가 증가했다. 50년대로 접어들면서 슈퍼히어로 장르 이외의 것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로맨스 장르 및 여성 독자층이 성장하게 되는 듯 했다. 하지만 50년대에 계속 만화독자 전체의 숫자가 감소했고, 만화는 다른 오락미디어에 지분을 내주었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만화 산업에 종사했던 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타의에 의해서(가부장 사회에서는 어떤 산업이 축소되면,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해고당하기 마련이다) 일을 그만두었다. 특히 워담으로부터 촉발된 만화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물결 속에서, 만화는 폭력적이고 거친 불량 오락물로 재규정되었고, 더더욱 여성들이 거리를 두어야할 물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60년대에 마블 코믹스가 뛰어들면서 나타난 ‘실버 에이지’ 노선의 결과, 미국만화의 주류는 완전히 10대 소년 지향의 슈퍼히어로물로 통일되어버렸다. 여성의 위치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것이었다. 하지만 7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만화 붐과 함께, 여성들은 다시 등장했다. 비록 주류만화계에서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트리나 로빈스, 로베르타 그레고리, 캐롤 레이 등 여성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작가들이 과감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이들은 '루루의 친구들'(현재도 활동중이며, http://www.friends-lulu.org에 사이트도 있다)이라는 여성만화 동인 집단을 만들고 [Wimmen's Comics] 잡지를 발간하는 등, 주류만화가 하나의 장르 하에서 점차 동어반복으로 빠지고 있을때 새롭고 정력적인 활력을 보여왔다. 유감스럽게도 직판시장(Direct Sales)의 유통망에서 큰 반향을 못일으키며 언더그라운드로서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만화의 형식적/내용적 측면에서 큰 저력을 드러냈다. 현재까지도, 에르난데스 형제의 [Love&Rockets]가 TPB 시장(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단행본 시장)에서 스테디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등 그 명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만약 위와 같은 미국의 상황에서, 6-7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만화 흐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고 하지만, 아마도 '루루의 친구들' 같은 조직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의 경우가 그것을 반증해주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여성만화가 한번도 하나의 경향으로 조직화되거나 장르화되지 못했다. 브레테셰나 세스탁 등 여성의 정체성을 뚜렷이 가지고 사회풍자 이야기들을 그려내는 작가들은 물론 존재하고 있지만, 전체 만화계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지는 못하다. 여성작가의 숫적인 비중 자체가 적은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만화계에서 여성의 힘을 모아내야만 한다는 어떤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할 계기가 없었던 것이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례로 플로렌스 세스탁의 경우, 여성정체성 짙은 작품활동 이외에도 72년에 진취적 성향의 만화출판사인 퓌튀로폴리스를 창업했고, [메탈 위를랑](영어명 ‘헤비메탈’) 등 남성향이 강한 SF/환타지 잡지에도 작품활동을 했다. 여성으로서 이전에 개별 작가로서 이미 충분한(?) 활동과 운신의 폭을 지니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 정체성을 무기화할 필요가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순히, 유럽에서 여성들이 전반적으로 만화와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성향 만화들은 때로는 마초적 모험물로, 때로는 포르노그래피로 열심히 특화되고 있었으나 여성에게 특화된 주류장르는 없다보니,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과 영미권에는 여성들을 만화의 세게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흐름이 최근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망가의 유입이다. 90년대 말 이래로 폭발적으로 서구에서 시장 지분을 늘려가고 있는 일본망가의 경우, 독자의 1/3에서 1/2 정도가 여성독자층으로 추산되고 있다. 쇼조망가 계열 작품은 물론, 일부 소년만화의 경우 마저도 서구 여성들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게 받아들여 것이다. 주류 장르만화에 여성의 자리가 생겨나고 있다는 이러한 현상이, 추후에 이들 서구 지역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발전해나갈지는,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여성만화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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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참고사항

*한국의 순정만화에 대한 자료들은 워낙 쉽게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으니 생략. [만화세계정복](두고보자, 길찾기, 2004) 제2장 추천. 그것 말고도, 대학원 논문 가운데 90년대 말 이래로 몇몇 좋은 문건들이 많으니 국회도서관 사이트 같은 곳에서 검색해보시기를.
* 일본 쇼죠망가에 대한 자료들...도 워낙 많고 쉽게 구한다. 게다가 한국 순정만화와 비교한 논문자료들도 많고... http://www.franken.com/girlscomic/ 에 있는 대담...꽤 재밌다.
* http://www.friends-lulu.org : 미국 만화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유서깊은 커뮤니티
* http://www.bdparadisio.com/femmes.htm 서구만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작가들을 유럽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개요. (주의: 불어!)
: http://dugoboza.net/tt/rserver.php?mode=tb&sl=24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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